드라마로 각본화로 쉽게 설명하는 "믿음으로 구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소유한 약자들이 세우는 교회.

 

 

역사 속의 약자들이 힘을 합쳐서 강자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적이고 건설적 조직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한 의를 이 땅에서 역사적 삶을 살아가면서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신들의 실체를 분명하게 체험하고 그런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사랑과 긍휼로 채워주시는 하늘 신랑의 사랑을 체감하게 되는, 자기들이 그것을 개발하고 성숙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그런 약자들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채워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 성도들의 삶의 결집체를 말하는 것이다.

약자들이 자신들의 무력하고 연약한 자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을 알아 가는 곳이다.

 

그렇게 승리하는 사람들인 역사 속의 약자들의 삶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과 성도의 결국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약자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지만 결국 신랑의 사랑을 얻어 내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신랑 되시는 예수의 심장을 선물로 받고 완전히 회복되어 신랑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하늘의 신방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아기서의 솔로몬의 사랑고백처럼 “별보다 예쁘고, 꽃보다 더 예쁜 나의 사랑하는 자여, 이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친구여, 네 곁에 있으면 사랑은 모두 너의 것.......”

 

이런 사랑을 해 본적이 있는가?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밤새 도시락을 싸서 천리길도 마다않고 군대 면회를 간다. 엄마 아빠는 배신감을 느끼고 속을 끓인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동네에 가서 그 사람 방에 켜진 불빛 마능로도 보고 싶어서 몇100마일이 넘는 길을 밤새 운전하고 다녀오기도 한다.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사랑이다. 부모들은 속이 터진다 나한테 좀 그렇게 해보라니까! 그러나 부모에게는 그렇게 안되는 것은 부모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은 색이 다른 것이다.

 

<난 네가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신랑은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면서 사랑했다>신랑되시는 예수가 교회를 향해 고백하는 말이다. 그 신랑의 피가 아니면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신랑이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신부가 죽은 시체이다 (-이것을 성경은 창조라고 한다-)그런데 생명과 죽음을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법이 있는데 “생명은 피에 있다”라는 법칙이다. 그러기에 죽은 자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자격이 있는 자가 내어주는 피가 필요하다.

 

신랑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신랑이 자진해서 그 피를 바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신부를 구출해 내야 하니까 신부가 들어가 있는 사망이라는 영역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도성인신(Incarnation)이라고 한다.)

 

그렇게 사망 속으로 들어간 신랑은 그 사망 속에서 신부를 만난다, 신랑은 사망과 관계없지만 사망 속에 일부러 들어가지 않으면 신부를 만날 수가 없다. (-이것이 거룩과 피조물의 관계이다-)

그 거룩(하나님)이 그 사망(인류역사)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뚫고 들어가자마자 신부를 자기와 하나로 묶어버렸다 (-이것을 약속 혹은 언약이라고 한다. 묶을 약, 묶을 속-)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면서 그 이유를 그 열조와의 언약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약속, 언약 때문>이란다. 약속인 묶는것은 이스라엘의 자격과 됨됨이에 상관없이 언약을 따라 당신의 백성을 자기와 묶어버리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죄와 상관없으신 신랑은 이제 사망의 역역에서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사망은 죄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가 없는 어떤 이가 사망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사망은 자기 떡인 줄 알고 덥석 삼켰다. (마귀가 예수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죽였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거룩이 들어온 것이다. 밷어야 한다. 사망이 거룩을 삼키면 치명상을 입는다. 그래서 사망은 맛이 없는 그 존재를 확 밷어 버렸다. 무덤 문이 다시 열린 것이다. 다시 나가 달라는 것이다

신랑이 사망에서 튀어 나오는데 그 몸에 묶여 있는 약속으로 신부가 묶여 있다. 거기서 신부가 하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신랑을 꼭 붙둘어야 하는가? 신부다움을 잘 유지해야 하는가? 이니다, 죽음에 있는 신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랑이 묶어 놓은 것이다(약속/언약-신약과 구약) 그래서 신랑이 사망 속에 들어와 신부와 묶고 튀어 나온 것이다. (-이것을 구원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깨닫는 이들을 성도라 한다-)

 

언약은 그 대상의 행위를 부정하고 배제한다. 언약은 무조건적으로 부어지는 은혜이다. 그렇게 사망 안에 갇혀있는 신부를 구출하기 위하여 신랑이 사망 안으로 들어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로 스스로 내려간 것이다. 사망 속으로 들어간 그 자체가 세상 속에서는 그 존재의 부정이다.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데까지 내려가신 것이다.

사망으로 내려간 신랑은 구출한 신부에게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나는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수 있다>라는 사랑의 고백이 들리지 않는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너를 바꾸자 않겠다는 예수의 사랑고백이 들려야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사랑을 한 번씩은 꼭 해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다른 이가 다른 이보다. 전혀 나은 것이 없을 뿐아니라 신랑이 내가 속해 있던 사망으로 들어와 나를 건져냈을 때 내가 나 스스로를 보니 내가 다른 이보다 하나도 나은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게달의 장막이고, 포도원의 노예처럼 못난 존재, 술람미 여인이다. 신랑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차별적인 긍휼로 내가 갇혀있는 사망 안에 출격해 들어와서 나를 뽑아 준 것이다. 심장을 내어준 것이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부인 교회는 그 사랑을 깨닫고 신랑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그 신랑이 준비해 놓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그냥(값없이) 나가는 것이다. 나의 술람미의 검은 피부를 예루살렘 여인처럼 희게 만들어서 잔치자리에 나가는 것이 아니고 게달의 장막같은 누추함을 발전시키고 개발하여 잔치에 나가는 것이 아니다. <내 모습 이대로... 나 지은 것 죄뿐이니.... 천부여 위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이렇게 두 손 번쩍들고 면목없이 그러나 감사함으로 혼인 잔치로 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신랑을 사랑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이기에 날 그렇게 사랑하셨는가가 절절히 느껴져야 한다. (다윗의 고백 : 사람이 무엇이길래, 인자가 무엇이길래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나이까!) 이것을 롸서 5장에서는 화목이라 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자임을 아는 것, 그것을 변화/성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신부의 유일한 지참금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신부가 가지고 갈 것은 “믿음”밖에 없다. (예복/신부의 세마포)

신부에게 왜 <믿음>만 요구하는지 아는가? 왜? 믿음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 믿음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못 내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는 당신을 믿어”라고 할 때 믿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아는 믿음의 정의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같다고 생각하는가?

<신랑만 사랑하고, 신랑만 자랑하게 하시려고 그 어떤 신부의 도움을 받지 않으시고-사망한 시체가 무엇으로-오직 신랑 자신의 피로만 신부를 구출해 내셔서 혼인을 올리신다. 그래야 신랑의 영광이 들어나고 신랑만 찬송을 받는다.

 

갈 2:16-17

우리는 말 떼부터 유대인이지 소위 말하는 ‘이방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하다가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판명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한다고 맣 수 있습니까?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엡 2:8-9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고전 1:28-31

세상이 대단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들을 형편없이 낮추려고 천한 사람ㄷ과 멸시받는 사람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하난미께로부터 와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고 또 우리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우리 죄값을 지불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경의 < 자랑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 >는 말씀과 같습니다.

 

롬 3:21-22

그러나 지금은 율법과 관계없이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에 의해서 증거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차별없이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추악성, 무능력성을 드러내고 폭노했다. 열림 무덤, 피흘 리는 혀, 좁비 등등은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

롬 3:21절에 “그러나 지금은” (누니데)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그것이 예수이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율법 외에” - 율법을 부정하고 나타난 하나님의 다른 한 의.

그렇다고 율법이 완전히 폐기된 것 아니다. “외에”

율법은 예수라는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것, 따라서 인간이 율법을 통해 배워야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의 필연성>이라는 것이다.